알밤은 우리 식탁에서 계절을 알리는 재료이자, 지역의 땅과 기후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농산물이다. 같은 품종이라도 어느 산자락에서 자랐는지, 어떤 방식으로 건조하고 저장했는지에 따라 향과 식감이 크게 달라진다. 밤은 단순히 탄수화물과 당도를 겨루는 과일이 아니다. 탄닌의 잔향, 전분의 분해 정도, 수분과 껍질 두께 같은 세부 요소가 입안의 경험을 좌우한다. 현장에서 농가를 돌며 맛본 결과, 밤의 개성은 지역의 토양 성분과 미세기후, 재배 관행이 켜켜이 쌓여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여기서는 한국 주요 산지의 알밤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피고, 제철성과 보관법, 껍질 제거 디테일, 활용 요리까지 실제적인 정보를 담아 정리한다. 검색 포털에서 떠도는 단편적 정보보다 한 계절을 통째로 겪으며 적어둔 메모를 바탕으로 했으며, 맛의 차이를 만드는 결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풀어본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큐레이션 사이트, 예컨대 아이러브밤 같은 정보 모음에서 지역 상자를 고르려 할 때도 이 글이 기준점처럼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지역 정보는 광주알밤처럼 지역명을 내건 판매 채널을 통해 유통되기도 하니, 명칭이 상품 기준인지 산지 기준인지 구분해 보는 안목도 필요하다.
토양과 기후가 빚는 차이
밤나무는 뿌리가 깊고 수분을 골고루 끌어올린다. 그래서 강우량 자체보다 배수와 표토의 구조가 더 중요하다. 모래 함량이 높은 사양토는 당도 상승에 유리하지만 과하게 건조하면 전분이 굳어 식감이 퍽퍽해진다. 반대로 점토 비율이 높아 무거운 땅에서는 과실이 크고 수분이 많아진다. 다만 익힘 과정에서 전분이 쉽게 풀리며 단맛이 두텁기보다 안정적으로 나온다. 해발 200미터 내외의 완만한 남사면은 일조 확보가 좋고 아침 안개가 적어 병해가 덜하다. 북사면은 성숙 속도가 늦고, 왕겨 건조를 병행해 전분을 단단히 잡아주지 않으면 고유 향이 얇아질 수 있다.
기술적으로 보면 밤의 당도는 브릭스 기준 15에서 20 사이에서 움직인다. 하지만 혀가 느끼는 달콤함은 수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수용성 당과 함께 전분이 덜 분해된 상태에서 찌거나 구우면 포만감과 밀도가 살아난다. 반대로 저장 중 효소가 전분을 더 분해하면 달콤함은 증가하지만 젤리 같은 질감이 생기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 이 균형을 잡는 방식이 다르다. 수분이 많은 산간 지역은 수확 즉시 예비건조를 길게 가져가고, 바람이 센 해안가에 가까운 산지는 건조를 짧게 끝내도 균형이 맞는다.
영동과 태백 자락, 산바람이 키운 단단한 맛
강원 남부와 경북 북부에 걸친 고랭지대 밤은 껍질이 상대적으로 두껍고 속살이 단단하다. 해발이 높아 일교차가 크고, 9월 이후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면서 숙성이 느려진다. 덕분에 전분이 촘촘히 응집되고 지질의 고소함이 길게 남는다. 삶았을 때 결이 또렷하고, 손으로 쪼갤 때 균열면이 깨끗하게 드러난다. 이런 밤은 군밤이나 푹 찌는 방식보다, 오븐에서 중온으로 서서히 구워 내는 것이 좋다. 180도에서 20분, 이후 160도로 낮춰 10분 더 구우면 겉껍질이 자연스레 벌어지고 속은 설익지 않는다.
이 지역 농가들은 대체로 밭의 경사가 있고 배수가 탁월해 탄닌의 쓴맛이 표면으로 빠르게 정리된다. 다만 장마가 길면 껍질 미세 균열을 타고 벌레가 파고들기 쉬워 예냉과 살균 공정에 신경 쓴다. 수확량은 평년 기준 10a(300평)당 400에서 600kg 정도로, 평지보다 다소 낮지만 알이 밀도 있게 올라온다.
충청 내륙, 온화함이 만든 균형형 밤
충북 보은, 옥천, 충남 금산 일대는 밤의 표준기를 세우기 좋은 지역으로 꼽힌다. 토양이 비교적 균일하고, 해마다 수확 시기가 극단적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전분과 수분의 균형이 좋아 찜밤과 조림에 두루 어울리고, 제수용으로 껍질이 매끈한 알이 많이 나온다. 이런 산지의 밤은 단맛이 캐러멜처럼 진득하기보다는 곡물차의 담백함과 가깝다. 반찬에서 주연을 맡기보다 다른 재료를 받쳐 주는 조연의 미덕이 있다.
현장에서는 수확 후 24시간 이내 예냉을 권한다. 온도는 0도에 가깝게 내려 당분 전환 속도를 늦춘다. 이후 2주 정도 0에서 1도 사이에서 숙성시키면 삶았을 때의 고소함이 또렷해진다. 이 과정에서 과도한 건조를 피하려면 상대습도를 85에서 90퍼센트 수준으로 꾸준히 유지해야 한다. 가정에서는 김치냉장고의 채소칸에 숨구멍을 조금만 열어 둔 비닐팩으로 대체하면 근사치가 나온다.
경기 남부와 서해권, 바람과 염분의 미세한 영향
화성, 안성, 평택, 서산으로 이어지는 띠는 바닷바람의 영향권이다. 바람은 수분을 빼앗지만 병해를 줄이는 데도 이롭다. 염분이 직접적으로 밤의 맛을 바꾸는 정도는 미미하지만, 해풍이 잎의 두께와 기공 개폐 패턴에 영향을 주면서 성숙 속도를 달리 만든다. 한 해 동안 가보면 비가 많은 해에도 과육이 물러지지 않고 탄력성을 유지하는 편이다. 굽거나 에어프라이어를 쓸 때 과육이 터지며 수분이 급격히 날아가는 경우가 적다는 뜻이다.
이 지역 밤은 크기 선별이 잘 되어 소포장으로 유통되기 쉽다. 도시 근교라 직거래가 활발하고, 온라인 기반 주문 시스템과 연동된 농가도 많다. 아이러브밤 같은 큐레이션 페이지에서 농가별 건조 방식과 예냉 조건을 공개하는 경우가 있어 선택이 편하다. 다만 젊은 과수원일수록 품종을 수시로 교체하는 경향이 있어, 해마다 미세한 맛의 편차가 생긴다. 구매 전 수확 주간과 선별 기준을 확인하면 실수가 줄어든다.
영남 내륙의 묵직한 단맛과 저장성
문경, 상주, 밀양과 합천으로 이어지는 벨트는 가을 낮 기온이 높고 밤 기온이 천천히 떨어진다. 이 패턴은 당분 전환을 오래 끌고 가며, 저장성을 높인다. 수확 후 한 달을 넘겨도 볼품이 크게 나빠지지 않고, 구웠을 때 유분감과 고소함이 또렷하다. 반면 과육의 결이 유연해 삶는 과정에서 약간 부스러지는 편이라 밤조림은 강불에서 짧게 당도를 입히고 잔열로 속을 익히는 쪽이 좋다.
영남 내륙은 대대로 농가가 넓고 기계화가 잘 돼 있어 대량 가공용 원물 공급이 안정적이다. 빵집이나 전통과자점에서 이 지역 밤을 선호하는 건 일정한 사이즈와 껍질 벗김 효율 때문이다. 민무늬처럼 매끈한 속껍질은 다소 드물지만, 열을 가했을 때 속껍질과 과육 사이가 깔끔히 분리되는 비율이 높다. 작업장에서 손실률이 낮아지는 지점이다.
남해안과 지리산 기슭, 향이 가벼워도 질리지 않는 타입
하동, 남해, 진주, 구례 일대의 밤은 향이 가볍고 산뜻하다. 비가 잦은 편이지만 바람길이 열려 껍질 표면이 빨리 말라 버짐이 덜하다. 이 지역 밤은 에어프라이어로 단시간 구워도 떫은맛이 남지 않으며, 껍질 갈라짐이 빠르다. 알이 크지 않아 도시락 반찬으로 삶아 넣거나 찰밥에 섞기 좋다. 찰밥의 당과 밤의 당이 겹치지 않고, 서로의 온도를 지켜 주는 느낌이 있다.
지리산 북사면의 밤은 같은 지역이라도 깊은 협곡과 일조 차로 품질 편차가 크다. 이 때문에 농가마다 수확 시기를 한 주 단위로 촘촘히 나눠 출하한다. 선별이 잘 된 곳은 껍질 두께가 일정하고 속껍질이 얇다. 껍질 벗김 도구를 사용할 때 날이 과육을 파고드는 사고가 줄어든다.
호남 들녘과 산자락, 광주알밤으로 불리는 유통권
호남권은 큰 들판이 많지만 밤나무는 산기슭에 집중돼 있다. 담양, 화순, 곡성, 장성에서 생산된 밤이 광주로 모여들며, 지역 유통에서는 광주알밤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한다. 이는 산지명을 가리키기보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집산지와 선별 라인의 시스템을 의미한다. 광주알밤은 빠른 회전율 덕분에 신선도가 좋다. 시장에 따라 당일 들여와 당일 파는 곳도 적지 않다.
이 권역의 밤은 씹을수록 단맛이 올라오는, 오래 씹기에 좋은 타입이 많다. 삶아서 반 가른 다음 살짝 소금을 곁들이면 단맛이 선명해진다. 샐러드에 넣어도 존재감이 너무 강하지 않아 드레싱과 충돌하지 않는다. 단, 가을비 이후 급히 수확해 들어온 물건은 수분 과잉으로 삶는 중 터지는 비율이 높아질 수 있다. 장터에서 손으로 들어 본 뒤 묵직함이 균일한지 확인하거나, 기존에 거래해 본 상인의 선별 관행을 믿는 편이 안전하다.
품종과 수확 시기의 교차점
국내에서 흔히 접하는 품종은 대부분 일본계 개량종과 토종 계통이 섞여 있다. 토종은 알이 작아도 전분감이 깊고, 개량종은 사이즈와 균일성이 강점이다. 같은 품종이라도 수확 시기가 일주일 앞서느냐 뒤서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성격이 된다. 빠른 수확은 떫은맛이 미세하게 남고 보관성이 좋다. 늦은 수확은 자연 낙과를 중심으로 모아 당도가 높고 향이 진하다. 다만 껍질 미세균열이 많아져 벌레 피해와 곰팡이 위험이 커진다. 유통에서 종종 보이는 3차 선별, 즉 낙과 중 외관이 좋은 것만 다시 골라내는 작업은 바로 이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다.
품종 혼식도 늘고 있다. 한 과수원 안에 숙기가 다른 품종을 섞어 리스크를 분산하는 방식이다. 태풍이나 장마로 특정 주간 수확이 날아가도 전체 생산이 무너지지 않는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주차별 맛 차이를 인정하면서, 필요에 맞는 주간을 고르는 전략이 합리적이다. 예를 들어 군밤용으로는 숙기가 늦고 알이 단단한 주차를, 밤묵이나 페이스트용으로는 전분이 느슨해지고 단맛이 진해진 주차를 택한다.
껍질과 속껍질, 손질 기술의 작은 차이
밤을 좋아하지만 손질이 번거로워 멀어지는 사람도 많다. 사실 작업 순서와 도구만 제대로 잡으면 속도가 배로 빨라진다. 날이 짧고 단단한 칼, 또는 밤칼을 쓰되, 칼끝보다 칼등에 힘을 두는 게 안전하다. 껍질을 세로로 한 줄 깊게 가른 뒤, 끓는 물에 2분 데치고 즉시 찬물로 식히면 겉껍질이 놀라며 벌어진다. 이후 속껍질을 벗길 때는 결을 따라 얇게 긁어낸다. 너무 오래 데치면 전분이 풀려 맛이 빠진다. 전자레인지로 30초만 예열해도 껍질이 활짝 열린다. 다만 레인지 가열은 과육이 마르기 쉬워 대량 작업에는 권하지 않는다.
속껍질이 유난히 얇은 산지는 삶거나 찔 때도 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벌어진다. 반대로 두꺼운 산지의 밤은 굽기 전에 칼집을 넓고 깊게 넣어야 압력이 빠진다. 현장에서는 칼집이 1.5센티미터 남짓 되도록 횡으로 긋는다. 칼집을 X자로 겹치면 과육이 터질 확률이 올라간다. 군밤통을 쓸 때는 통 내부 온도가 220도 근처에서 출발해 10분 내 200도 아래로 떨어지는 구간이 가장 맛있다. 가정에서는 에어프라이어 190도 12분, 뒤집어 6분을 기본값으로 삼고, 밤 크기에 따라 2, 3분씩 조절한다.
보관, 신선과 숙성의 경계
밤은 호흡이 활발하다. 실온 보관은 며칠만 지나도 당분이 소모되고 싹이 올라올 수 있다. 저온 저장이 답인데, 0에서 1도 사이가 가장 안정적이다. 냉동은 껍질을 벗긴 뒤 가능한 한 수분을 덜 머금게 해서 진공 포장하면 3개월까지 무리 없다. 다만 해동 후 질감이 생밤과 다르다. 페이스트, 스프, 케이크 속재료처럼 질감이 바뀌어도 되는 용도에 알맞다. 껍질째 냉동도 가능하지만, 해동 시 껍질이 눅눅해져 벗기기 더 힘들어진다.
호흡열을 빼는 것도 중요하다. 수확 직후의 밤은 같은 상자 안에서도 중심과 가장자리가 2도 이상 온도 차가 나기도 한다. 소포장으로 나눠 숨구멍이 있는 봉투에 담고, 내부에 마른 키친타월을 한 장 넣어 결로를 흡수하면 곰팡이 위험이 줄어든다. 한 번이라도 따뜻한 실내에 오래 두었다가 다시 냉장하면 표면에 수분이 맺히며 상황이 나빠진다. 이왕 들여온 밤은 손질 계획을 먼저 세우고, 필요한 양만 굽거나 찌는 것이 낭비를 막는 지름길이다.
조리에서 드러나는 지역별 장단점
수프나 페이스트는 수분이 많은 남부나 호남 계열 밤이 유리하다. 믹서에 갈아도 모래감이 적고, 우유와 버터를 섞어도 분리가 덜하다. 반대로 다이스로 썰어 필링에 섞을 때는 강원과 영남 내륙 계열 밤이 모양을 잘 유지한다. 약과나 정과처럼 조청과 장시간 만나야 하는 조리에는 충청 내륙 밤이 무난하다. 당도가 과하게 높은 밤은 조청의 끈기가 과육에 스며들며 눅눅해질 수 있다.
군밤의 경우, 알이 작은 토종 아이러브밤 계열은 외관상 매력이 덜해 보여도 팔린 뒤 재구매율이 높다. 입안에서 바삭함 없이도 심심하지 않은 밀도를 만들기 때문이다. 알이 큰 개량종은 보기 좋아 선물용으로 탁월하고, 굽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단맛이 농축되지만 중간에 한 번 반드시 뒤집어야 급격한 수분 손실을 막을 수 있다.
가격과 시장, 정보의 비대칭을 줄이는 법
밤은 수확 직후와 명절 직전, 그리고 첫 추위가 온 직후에 가격이 출렁인다. 소비자가 체감하는 가격은 크기 선별과 포장 단위, 배송비가 더해져 복잡해진다. 산지에서는 보통 1킬로그램당 소매가 6천에서 1만 2천 원 사이에서 움직이지만, 대도시의 특수 소매점에서는 선별이 촘촘하다는 이유로 1만 5천 원을 넘기도 한다. 이런 격차를 줄이려면 표준화된 선별 기준과 보관 조건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몇몇 유통 채널, 예컨대 사용자가 구매 후기와 산지 정보를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오피사이트 성격의 큐레이션 페이지들은 입고 주차, 예냉 방법, 건조 시간 같은 세부 항목을 보여준다. 아이러브밤 같은 명칭으로 운영되는 페이지도 있는데, 이런 곳에서는 지역별 특성이 비교적 정확히 설명되어 소비자 선택에 도움이 된다. 다만 상호명이나 페이지명은 브랜드일 뿐, 실제 품질은 출하 시점과 선별 책임자의 숙련도에 좌우된다.
신뢰할 수 있는 상인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주차를 숨기지 않는다. 둘째, 크기 구간을 넓게 잡아 과대 포장 느낌을 피한다. 셋째, 반품과 환불 기준이 분명하다. 이 세 가지만 확인해도 실패 확률이 크게 줄어든다.
지역 맛지도의 실전 활용
가족 모임이나 선물, 레시피를 기준으로 산지를 고르는 방식이 현실적이다. 단단한 밤으로 군밤 파티를 계획한다면 일교차가 큰 강원 남부, 경북 북부 계열을 고른다. 밤페이스트나 몽블랑 디저트를 만들려면 남해와 지리산 기슭, 호남권의 촉촉하고 향이 가벼운 밤이 잘 풀린다. 제사상과 한과, 조림에는 충청 내륙처럼 무난하고 균형 잡힌 밤이 안전하다. 오래 두고 하나씩 꺼내 구워 먹고 싶다면 영남 내륙처럼 저장성이 좋은 산지가 맞다.
맛이야 결국 개인의 취향이지만, 취향에도 문법은 있다. 군밤에서 바삭함을 기대하는 사람은 알이 크고 수분이 적당히 잡힌 밤을 선호하고, 젖은 수분감과 스푼으로 떠먹을 만큼 무른 질감을 좋아한다면 수프용 밤을 찾게 된다. 같은 밤이라도 조리법을 달리하면 성격이 크게 바뀌니, 산지 선택과 조리법을 묶어 사고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계절성, 첫물과 막물의 미세한 온도
첫물은 설렘이지만 완성도는 막물에 미치지 못한다. 9월 초중순의 첫물은 알이 작고 수분이 많아, 삶아 먹으면 향이 날아가고 군밤으로 굽기에는 껍질 분리가 덜하다. 반면 10월 중하순의 막물은 전분이 단단히 자리 잡아 씹는 맛이 훨씬 좋다. 수분이 지나치게 빠지는 순간만 조심하면, 막물은 조리 실패가 적다. 농가에서는 첫물로는 페이스트와 술빵용 속을 만들어 두고, 막물로는 선물과 직거래를 집중한다. 소비자도 이 흐름을 알고 선택하면 만족도가 높다.
다만 첫물이 맛없다는 편견은 반쯤만 맞다. 첫물 중에서도 예년보다 더운 여름을 지나 당화가 빠르게 진행된 해에는 첫물이 의외로 좋다. 반대로 막물도 서리가 일찍 내리면 과육 외곽이 유리처럼 단단해져 열을 넣었을 때 균일하지 않게 익는다. 한 계절 동안 산지 소식과 기온 변화를 꾸준히 추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알밤을 고를 때, 현장에서 쓰는 짧은 기준
- 손에 쥐었을 때 묵직하고, 흔들었을 때 딸그락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내부 수분과 과육이 빈틈 없이 차 있다는 신호다. 표면 광택이 균일하고, 까만 점이 군데군데 있지만 움푹 패인 상처는 없다. 지나치게 번들거리면 인위적 광택 처리일 수 있다. 칼집을 살짝 내 봤을 때 속껍질이 얇고 황백색 과육이 선명하다. 변색이 보이거나 점액질이 묻어나오면 보관 중 문제를 겪은 것이다. 상자에 담긴 밤의 크기가 지나치게 제각각이면 선별이 느슨하다는 신호다. 크기 편차는 조리 시간 편차로 이어진다. 판매자가 수확 주차와 보관 온도를 말해 준다. 모호하게 둘러대면 다른 상자를 고른다.
이 다섯 가지 기준은 현장에서 짧게 확인해도 효과가 크다. 온라인 주문이라면 상품 설명과 후기에서 같은 포인트를 찾아보고, 주차와 보관 조건을 문의하면 판매자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지역 스토리와 지속 가능성
밤나무는 관리가 까다롭다. 가지치기와 병해방제를 소홀히 하면 다음 해 수확에 바로 영향을 준다. 최근 몇 년 사이 꿀벌 개체수 감소로 수분 상황이 나빠지며 알이 작아지는 문제가 있었다. 산림과 농업의 경계 관리가 엉성해져 멧돼지와 고라니 피해가 늘어난 것도 변수가 되었다. 지역별로 대응이 다르다. 강원과 경북 북부는 전기방목 울타리와 야간 순찰을 늘리고, 남부권은 밀도를 낮춰 나무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식으로 가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단순한 가격 비교를 넘어, 농가가 어떤 재배 철학과 방식을 유지하는지 살펴보는 편이 장기적으로 더 맛있는 밤을 보장한다.
정확한 라벨링과 투명한 정보 공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 지역 간 건강한 경쟁이 가능해진다. 특정 지역명이 과장된 마케팅 문구로만 쓰이지 않도록, 산지와 유통 모두가 데이터와 기록으로 신뢰를 쌓아야 한다. 광주알밤처럼 지역 이름과 유통 시스템이 결합된 호출어는 장점도 많다. 집산지의 효율은 신선도를 높이고, 선별 표준을 지역 단위로 맞출 수 있다. 다만 소비자는 그 이름이 무엇을 보증하는지, 어디까지가 상업적 수사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요리에 맞춘 짧은 페어링 가이드
- 군밤: 강원 남부, 경북 북부의 단단한 알. 180도 예열 후 160도 마무리로 과육 보존. 밤조림: 충청 내륙의 균형형. 강불 5분, 약불 10분, 잔열 5분로 결 손상 최소화. 페이스트/수프: 남해, 지리산 기슭, 호남권. 우유보다 생크림 비율을 낮춰도 부드럽게 풀린다. 찰밥/도시락: 알 작은 토종 또는 남해권. 씹을수록 단맛이 올라와 밥과 균형. 베이킹 필링: 영남 내륙. 큐브로 썰어도 형태 유지가 좋아 식감 설계가 쉽다.
이 다섯 가지 조합은 대체로 실패 확률이 낮고, 각 지역 밤의 장점이 드러난다. 취향에 따라 바꿔 보되, 조리 온도와 시간의 기본값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현실적인 구매 루트, 그리고 신뢰의 축적
동네 시장, 직거래, 온라인 몰, 산지 택배. 경로가 달라지면 리스크와 편의가 바뀐다. 시장은 손으로 직접 고르는 재미가 있지만 편차가 크다. 직거래는 신뢰를 쌓으면 최고의 선택이지만, 첫 거래는 늘 조심스럽다. 온라인 몰은 편하지만 사진과 실제의 간극이 존재한다. 오피사이트 형태로 리뷰와 산지 정보, 주차, 선별 기준을 정리한 큐레이션 페이지는 이 간극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이름이 눈에 띄는 아이러브밤 같은 채널을 포함해, 어떤 페이지든 데이터 공개 범위와 사후 응대가 명확하면 이용해 볼 만하다. 반대로 지나치게 감성적인 문구만 넘치고 세부 정보가 빈약하면, 맛이 아닌 운에 맡기는 선택이 된다.
장기적으로는 자신의 기록을 만드는 것이 가장 강력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조리법으로 먹었는지, 만족도는 어땠는지 간단히 적어 둔다. 세 번만 반복해도 패턴이 눈에 들어온다. 나와 맞는 산지, 맞는 주차가 생기고, 맛있는 밤을 만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마무리, 밤을 더 오래 즐기는 마음가짐
밤은 조급함을 싫어한다. 급하게 삶으면 수분이 빠지고, 성질 급한 불은 표면만 태운다. 조금의 계획과 주의가 맛을 지킨다. 산지의 개성을 존중하고, 조리법의 균형을 찾아가며, 저장의 디테일을 챙기면 한 계절 내내 질리지 않게 즐길 수 있다. 지역별 특성을 이해하면, 상자 하나를 고를 때도 단순한 운이 아니라 판단이 개입한다. 그 판단이 쌓이면 다음 해에는 더 정확히, 더 자신 있게 손을 뻗게 된다.
올가을에 밤을 고른다면, 지도 위에서 출발하되 혀의 기억으로 도착하자. 산의 방향, 바람의 길, 물의 속도가 만든 차이를 존중하고, 내 취향의 틀을 한 칸씩 넓혀 보는 재미를 누려 보자. 그렇게 쌓인 한 해의 기록은 내년의 첫물 앞에서 빛을 발한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내가 좋아할 그 알을 집어 들 수 있을 것이다.